
히로시마 원폭의 또 다른 피해자
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. 히로시마 상공에서 터진 한 발의 폭탄이 세상을 바꿨습니다.
그 순간 죽어간 이들 중에는 일본인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. 강제징용으로, 혹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곳에 있던 7만 명의 조선인들이 함께 불타올랐습니다.
1. 사건 개요와 피해 규모
- 1945년 8월 6일, 히로시마에 ‘리틀보이’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. 이로 인해 약 70,000명이 즉사했고, 이후 수십만 명이 방사능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.
- 히로시마에는 당시 약 140,00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으며, 이들은 일본의 강제징용, 식민지 수탈 등으로 인해 그곳에 머물렀습니다.
- 전체 피폭자 중 한국인의 비율은 약 10~20%에 달했습니다. 한국 원폭 피해자 단체의 추산에 따르면, 약 70,000명의 한국인이 피폭되었고, 그중 약 40,000명이 1945년 말까지 사망했습니다.
- 한국인들의 치사율은 약 57.1%로, 전체 평균(약 33.7%)보다 훨씬 높았습니다. 이는 구조의 늦음, 의료 접근 제한, 차별적 대우 등의 이유 때문입니다.
2.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과 증언
이정순 (88세): 히로시마에서 초등학교를 가던 중 피폭되었습니다. 현재는 한국 합천에 거주하며 피부암, 파킨슨병, 협심증 등 여러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.
심진태 (83세): 부모는 군수물자 창고에서 강제노동 중이었으며, 피폭 후 시신 수습과 도시 복구 작업도 대부분 조선인들이 맡았습니다. 그는 “죽은 자들의 시신을 나르다 못해 먼지털이로 퍼담아 학교 운동장에서 태웠다”고 회상합니다.
한정선: 2세대 생존자로, 엉덩이 뼈 괴사증을 앓고 있으며 아들은 뇌성마비로 고통받고 있습니다. “이 고통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지만,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”라고 말합니다.
3. 구조와 차별
- 일본에 남은 일부 한국 생존자들은 ‘재일 코리안 피폭자’(Zainichi Hibakusha)로 불리며, 일본 정부의 피폭자 복지제도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었습니다.
- 일본 정부는 ‘외국인’이라는 이유로 의료지원과 보상에서 제외했고, 증인 확보가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신청을 기각했습니다.
- 한국으로 귀국한 생존자들 역시 한국 내에서는 사회적 낙인과 경제적 고립을 겪었습니다. 히로시마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병 환자처럼 취급받고 결혼도 기피 대상이 되었습니다.
- 정신질환, 암, 신장병, 심장병 등 다양한 질환이 생존자 및 그 후손에게서 나타났지만, 오랫동안 정부 차원의 조사는 없었습니다.
4. 일본과 미국의 책임 회피
- 전후 점령국이던 미국은 피폭자에 대한 구조보다는 방사능 연구에 더 관심을 두었고, 의료 책임은 일본 측에 떠넘겼습니다.
- 1963년 ‘시모다 사건’에서 일본 법원은 미국의 행위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시했지만, 피해자 개인이 미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할 권리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.
- 2016년,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기렸지만, 미국의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.
5. 운동의 시작과 확산
- 1956년 일본 피폭자 단체 ‘일본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’(Nihon Hidankyo)가 설립되었지만, 초기에는 일본인 중심의 단체였고 한국인을 배제했습니다.
- 1968년, 재일 피폭자 강문희가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하며 일본 내에서도 한국 피폭자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.
- 1970년, 한국 피폭자 손진두가 일본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고, 이후 소송을 통해 1978년 승소했습니다. 이 판결은 해외 피폭자들이 일본 내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.
6. 한일 관계와 운동의 분열
- 재일 피폭자 단체는 남한 지지 성향(Mindan)과 북한 지지 성향(Soren/Choren)으로 분열되어 활동해왔습니다.
- 북한계 활동가 이실근은 원폭 이후 공산주의자로 전향해 히로시마에 정착했고, 반핵 및 반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.
- 한국계 단체들은 199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추가 지원을 이끌어냈으며, 합천에 요양원이 세워졌습니다.
7. 후속 세대와 과학적 과제
- 한국 보건복지부는 2019년 처음으로 사실조사에 착수했고, 2020~2024년 사이에 유전자 조사를 일부 시행했습니다.
- 하지만 2세·3세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할지는 “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있을 경우”에만 고려하겠다고 밝혔습니다.
- 2005년과 2013년 연구에서는 2세 피해자들이 일반인보다 우울증, 심장병, 빈혈, 장애 등록률이 훨씬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.
8. 기억을 지키는 사람들
- 한국 합천에는 약 1,160명의 원폭 피해자 명패가 있는 추모관이 있으며, 2025년 7월 12일에는 일본 히로시마 시청 관계자들이 처음으로 공식 방문해 헌화했습니다.
- 그러나 사과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. 일본 시민운동가 이치바 준코는 “사과 없는 평화는 의미 없다”고 말합니다.
- 한편, 미국을 상대로 한 상징적 재판이 2026년 뉴욕에서 열릴 예정입니다. 이 재판은 미국 정부의 법적 책임과 사과, 배상을 요구하는 자리로, 피해자들이 직접 증언에 나설 계획입니다.
9. 연대의 사례
- 캐나다 사투 데네 원주민은 히로시마 폭탄에 사용된 우라늄을 채굴한 이들이며, 1990년대 히로시마를 방문해 직접 한국인 피해자에게 사과했습니다.
- 이들은 “정부는 하지 않았지만, 우리는 해야 했다”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습니다.
정리
한국인 원폭 생존자들은 제국주의, 냉전, 그리고 사회적 차별의 교차점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.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고통을 증명해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.
이제 이들의 목소리는,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이 다시 고조되는 시대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.
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. 피해자와 그 후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엄과 진실한 기억을 위해, 우리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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